컨텐츠 바로가기

  • LOGIN
  • JOIN
  • MYPAGE
  • CART
  • ORDER
  • WISH LIST
  • 즐겨찾기
검색검색

그림틀



현재 위치

  1. 게시판
  2. 안내 .홍보

안내 .홍보

그림틀 안내,작업설명,작품설명

샤갈< 나와 마을>
제목 샤갈< 나와 마을>
작성자 그림틀 (ip:58.76.150.133)
작성일 2006-07-06 12:24:10
추천 추천 하기
조회수 1584
평점 0점

 
샤갈 (Marc Chagall)
1887. 7. 7 러시아 비테프스크~1985. 3. 28 프랑스 알프마리팀 생폴.
러시아 태생의 화가·판화제작자·디자이너.

샤갈(marc chagall)은 비테브스크의 도시 벨로러시안의 유태인 거주지에서 가난한 대가족의 일곱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청어 염장 공장에서 일했으며 어머니는 가사일을 돌보았다. 학교시절부터 어린 소년 샤갈은 드로잉에서 뚜렷한 재능을 보였다. 형상의 창조를 금지하는 유태교에 거슬러 그는 19세의 나이에 지역 화가 예유다 펜의 공장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사진 작업실에서 수정하는 일을 하였다. 2년 후 샤갈은 성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로 생계를 꾸리게 되기까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힘겨운 생활을 했다. 짧은 기간 동안 미술 학교에서 학생 시기를 보낸 후 그는 러시아 발레단에서 소도구와 의상을 디자인하는 명성 높은 디자이너 레온 박스트에게 소개되어 그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스트는 곧 이 젊은 화가의 창조적인 개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샤갈에 대해 "나의 가르침을 경청한 후 그는 파스텔 연필을 집어들어 내가 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을 했다"라고 말했다.



1. 파리인 아방가르드

1910년 한 후원자가 샤갈이 파리로 이주하도록 도와주었다. 다음해 샤갈은 보지라르 거리 예술가 거주 지역인 '라 뤼슈'(La Ruche)에 작업실을 정하고 이사하였으며, 1914년 파리를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그는 그곳에서 파리의 전위 예술가들, 특히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 기욤 아폴리네르와 화가 카임 수틴, 페르낭 레제, 로베르 들로네 등과 친분을 맺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환경의 영향은 곧 그의 작품에 나타났다. 1911년 작품 <나와 마을>, <시인> 등에서 벌써 이전의 순진한 사실주의와는 다른 구성적 특징, 야수주의의 색 사용 방식, 그리고 입체주의나 오르피즘에서의 혁신적인 공간 처리 방식에 동화된 병화가 보인다. 그러나 샤갈은 형식과 색채에 대한 전위적인 실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인 도상학적 세계를 벗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러한 세계는 벨로러시아의 풍경, 농민들의 생활 정경, 유태인의 의식들과 같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들로 가득 찼다. 그것은 또한 그가 사랑하는 인물들, 특히 1915년에 그와 결혼한 비테브스크 출신의 젊은 여인 벨라 로젠펠드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했다.



2. 비테브스크로의 귀향

샤갈이 자신의 문화적 근원을 특수한 전위적 장식으로 해석한 작업들은 그가 비테브스크로 귀향하는 1914년까지 파리와 베를린에서 지속적으로 전시되었다. 고향을 잠시 방문하려던 그의 기대는 빗나가, 제 1차 세계대전과 잇따른 러시아 혁명에 의해 그는 8년이라는 기간을 비테브스크,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등지에 머물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샤갈은 좀더 개인적인 시도에 열중하였으며, 그의 전위적인 실험들은 완화되었다. 비록 샤갈은 원칙적으로 혁명에 공감하는 입장을 취했고, 또 그의 명성으로 인해 모스크바 문화부 조형 미술 책임자로 위촉받게 되었지만, 그는 비테브스크에 머물면서 지역 미술 학교의 교장으로서, 그리고 미술 위원으로서 일하기를 선호했다. 그러나 곧 샤갈은 동료들, 특히 그의 '전통주의'에 과격하게 반대하는 말레비치나 리시츠키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1920년에 샤갈은 그의 직분을 사임하고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무대 장치가로서, 그리고 고아들을 위한 드로잉 교사로서 일하였다.



3. 빛과 그림자

1922년 샤갈은 결정적으로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파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곧 화상(畵商) 볼라르와 초현실주의자들을 알게 되었으며, 매우 풍부한 결실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볼라르를 위해 성경을 포함한 책들의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샤갈은 여러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프랑스 각지와 이집트, 팔레스타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폴란드 등을 포함한 여러 나라로 지속적으로 여행을 하였다. 1931년에 그 자신의 전기인 <나의 생애>가 출판되었고, 1933년에는 그의 회고전이 바젤 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기회 등을 통해 그는 유럽의 예술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들은 그의 이와 같은 행운의 연속을 중단하였다. 나치의 박해와 전쟁을 그를 1941년 미국 망명길로 내몰았으며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변화의 징후가 되었다. 이 변화는 1944년 벨라의 죽음으로 더 심화된다. 그 이후 화가는 거의 일 년 가량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가 마침내 다시 작업에 임하게 되었을 때 이전의 밝은 색채는 어두운 색조와 우울한 효과로 바뀌게 되었다. 1940년대 중반에 제작된 작품의 대부분에서 그의 강한 색조와 시적인 꿈들은 악몽들로 전환된 듯하다.



4. 명성

1948년 샤갈은 프랑스로 돌아왔다. 2년 후 그는 생폴드방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내게 되었다. 1946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의 중요한 회고전들이 연속적으로 개최됐다. 그의 명성은 뉴욕,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취리히, 베른 등의 도시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며, 그는 영구적인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됐다. 파리로 돌아온 후 그는 '바바'라는 애칭의 발렌틴 브로드스키를 만났다. 그녀는 샤갈이 화가로서의 자신을 되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1952년에 결혼하였으며, 이후 샤갈은 그녀의 도움으로 큰 학회들과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66년에 완성된 <성경의 메시지> 연작으로서, 그것은 1973년 니스의 '마르크 샤갈 성서 미술관'에 장치되었다. 1964년에 그는 샤를 드골과 앙드레 말로의 요청으로 파리 오페라 극장의 천장을 장식하였다. 또한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거대한 규모의 벽화를 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샤갈은 석판공 샤를솔리에와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는 직공 샤를 마르크와 같은 장인들의 도움으로 다양한 기법과 매체 실험을 하였다. 그의 생애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이 기간 동안 그는 끊임없는 경의의 대상이 되었다
첨부파일 666.jpg
비밀번호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목록

수정 답변 삭제

댓글 수정

댓글수정 비밀번호 수정 취소

/ byte


이전 제품

  • 상품
  • 상품

다음 제품

TOP